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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라는 게 늘 그렇듯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찾아오다가도 꼭 끝을 내야 할 때는 어금니 구석에 낀 시금치 조각처럼 질기게 버티는 법이다. 헤어진 지 한참 된 여자 친구를 잊지 못해 그녀가 좋아하던 대게를 몰래 택배로 부치곤 했던 기갑이 형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좀 변태 같을까?’ 그 해 9월의 내가 기갑이형을 만났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저는 전생에 알 카에다 같은, 그런 거 였나봐요진숙이의 전화는 일주일동안 두 번으로 끝을 맺었지만, 그 이후 나는 술을 마셨다 하면 진숙이에게 20통씩 전화를 걸곤 했다. 어느 날은 중심도 못 잡을 만큼 취해 그녀의 집 앞에 오줌을 싸 놓고 유리창을 모두 깨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지하철을 탔다가 술이 조금씩 깨면서 조용히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진숙이가 좋아하던 영화를 보면서 시험을 못 봤다고 아빠한테 두들겨 맞은 어린애처럼 서럽게 울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남자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은 가슴 속으로 울고 싶을 때가 있다.’같은 글들을 적곤 했는데, 개만도 못한 친구 놈들은 퍼가요~라는 댓글을 달며 나를 조롱하곤 했다.

 

 어쩌다가 연락이 닿았을 때 진숙이의 목소리는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빨래를 널고 청소까지 마친 뒤에 보고 싶었던 드라마까지 모두 챙겨본 주부처럼 여유로웠다. ‘잘 지내?’ ‘응 그냥 그래’ ‘왜 자꾸 그래.. 힘들게’ ‘미안해..’ 아니, 그동안 우리가 같은 지붕 아래 레고처럼 단단하게 쌓아 왔던 떡정은?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나의 귀여운 고추는? 내가 너의 허벅지 사이에 불어 넣었던 입김을 모으면 GOD 공연장의 하늘색 풍선을 모두 불고도 남겠다! 그날은 왠지 술 생각도 나지 않았다. 차가운 고시원 바닥에서 웅크리고 있었는데 문득 달팽이가 되고 싶어졌다. 비를 맞으며 느릿느릿 길쭉한 촉수를 돌리다가 어느 화창한 날 시커멓고 코 뭍은 꼬마의 벽돌에 맞아 깨져버리고 싶었다.


 그렇고 그랬던 날들이 시계 속 모래알처럼 떨어져 내렸다. 영화로 치자면 찢어서 넘기는 1일 달력이 휘날리며 나의 이런저런 모습들이 오버랩 되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한 일이라고는 더 이상 진숙이에게 전화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뒤에 오늘부터 마라톤을 하겠어하고 비 오는 날 운동장을 뛰다가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이러다 폐렴이라도 걸려 죽는 게 아닐까싶어 포기한 일과 고시원에서 달팽이가 되고 싶어 했던 일들뿐이었다. 시험이고 뭐고 학교생활은 당연히 죽을 쑤었고 아는 이들 사이에선 내가 난봉질을 하다 성병에 걸려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사랑? 웃기지마 너네도 언젠간 끝나라며 아무 곳에서나 저주를 퍼붓고 다니는, 쇼펜하우어 뺨을 곤장으로 때릴만한 염세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 날도 그랬다. 상수와 함께 심리학개론을 들으면서 심리학과 가면 철학과 보다 할 일이 없다며?” “그 무슨 심리 치료사인가 하는 거 하려면 학벌이랑 빽이 제일 중요하대 국가고시가 없어서 자격증도 있으나 마나래라며 더러운 세상 속의 고결한 중2처럼 불만을 꾸역꾸역 토해냈다. “저기 조용히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망할 년 같으니라고. 분명히 잘못한 건 난데 괜히 짜증이 났다. 까무잡잡하면서 통통하고 주근깨가 살짝 피어오른 얼굴이 뒤를 돌아보았다. 두툼한 쌍커풀 아래 길쭉한 속눈썹을 보니 여가 시간에 훌라 댄스나 추면 어울릴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뒤통수를 슬슬 긁었다.


 친구에게 빌렸던 다이아 목걸이가 모조품이었다는 게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그런 건 소설에서나 나올 법 한 이야기겠지. 꼬질꼬질한 인생의 아이러니란 수업시간에 떠들다가 쫑코를 먹은 나와, 나에게 시끄럽다고 한 그녀가 조별 과제를 하게 되었다는, 그래 딱 그 정도 수준의 이야기면 적당하겠군!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팔짱을 끼고 허리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는 그녀와 같은 조가 되어 심리학과는 전혀 연관이 없을 중추신경에 대해 발표하게 되었다. 라면 괜히 쓸모없는 기대라도 해 볼 수 있었겠으나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다. 심지어 그녀를 수업 시간에 볼 일도 없었다. 이후로 학교를 간 적이 없으니까.

 

 비가 몇 번 왔다. 집까지 오는 길에 심어져 있던 플라타너스 잎이 거의 떨어져 있었다. 축축하면서도 스산한 기운마저 드는 11월 저녁이었다. 고시원 바닥에 누워 불알을 만지작거리다가 게으른 하품을 하고 일어나 담배를 뻑뻑 피우는 중 문자음을 들었다. ‘오빠 술 사주세요오래전부터 관심 없던 순자였다. 순자로 말할 것 같으면 22년 동안 남자를 딱 한 번 만나 보았는데,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하던 남자가 두 달 만에 바람이 나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전쟁고아처럼 헤매다가, 만취 상태로 길가에서 뻗어 응급실까지 실려 갔던 아이다. 당시 병원에서 CT촬영까지 했다고순자를 어색하게 알고 있었을 때, 내가 아는 금세기 최고의 눈치 없는 변태 함 형이 얼큰하게 취해 순자를 포함한 몇몇 여자 아이들을 잡아놓고 남성의 자위와 효과적인 애무에 대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스무드하게 자리를 깬 적이 있었는데 순자는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 듯 했다. 언젠가 책상에 자빠져 수업이 끝난 줄도 모르고 자던 나에게 조심스레 따스한 캔 커피를 놓고 가던 아이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순자는 나를 보고 짧게 웃었고 나는 깐풍기와 소맥을 떠올렸다. 고개를 숙인 순자가 치킨 무에 포크를 푹 꽂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왜 늘 이럴까요?” “외로워서 그래” “오빠는 안 외로워요? 만날 바보짓만 하고 다니고. 친구들이 오빠 성병 걸렸대요.” “진짜 걸렸을 지도 몰라. 그래도 난, ? 이런 관계있잖아. 그런 거, 육체적인 거, 그런 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해” “오빠가 사랑하던 여자들은 어땠어요?” “뭐가?” “그냥 생긴 거나 성격이나 추억거리나” “몰라 이젠 기억도 안나” “바보나는 순자에게 강력한 꿀밤을 한 대 놓아 주었다. 순자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상태였지만 화난 것처럼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2차는 네 집에서 먹자. 물론 네가 쏴라

 

 투덜투덜 거리던 순자는 내가 카드를 긁는 모습을 보더니 슬쩍 나가 문을 열었다. 우리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 피쳐 한 통과 소주 한 병과 소스가 없어 슬픈 나쵸 한 봉지를 사서 가로등이 띄엄띄엄 놓여있는 주황색 아스팔트 위를 걸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서늘한 순자의 방에서 꾸물꾸물 봉지의 물건들을 늘어놓고 침대 밑에 나란히 기대어 술을 마셨다.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순자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오빠. 혼전순결을 지켜야 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는데, 그게 뭐라고 생각해요?” ‘좆까라 그래 속궁합 모르냐?’라는 대답을 해 주리라는 생각으로 나는 순자에게 키스를 했다. 혓바닥과 혓바닥 사이의 시간이 흘렀다. “오빠 저랑 사귈 거에요?” 나는 다시금 키스를 하며 순자의 허벅지를 쓰다듬다가 가랑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따뜻한 그곳은 푹 삶은 다시마처럼 미끈하게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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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연애라던가, 섹스라던가, 남녀 간의 미묘한 심리라던가, 외로움이라던가, 가끔 우리의 삶을 탈수라도 시키듯 거칠게 휘두르는 그 육중한 감정들이 때론 정말 별 것도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여태껏 살아왔던 경험과는 무관하게 정말 그럴싸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고백하는 마음으로 써 보았습니다. 글을 조심스레 써 내려가면서도 정말 있었던 일인 것 같은 리얼리티에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주인공에 몰입되어 마치 내가 저질렀던 일들인 양 써내려가기도 했고요. 덕분에 누군가를 위해 쓴 글이 전혀 그렇지 않게 되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남들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누군가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상상해 보았던 일들이 전혀 쓸모없지는 않다고 느껴집니다. 소설은 소설일 뿐. 실제와 혼동하진 않으셨으면 좋겠고요. 이 글을 재미있게 읽으셨던 여러분 모두 올 한해 뜨거운 사랑과 함께 파워섹스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개같이 헤어지고 소같이 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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