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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마이애미 비치

마이애미 비치 (7)

프로매국노 2013. 5. 3. 15:42

 나는 여자들이 참 웃긴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녀들은 어떤 상황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것을 좋아하며, 항상 자기합리화에 강하다. 이 두 가지 강점을 통해 여자들은 만약 자신이 원전 폭발 사고보다 무지막지한 쌍년이 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일종의 연금술보다 위대한 심리적 작용을 스스로 가하곤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보자면, 난 여태껏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 항상 그런 식이다. '나도 잘못을 하긴 했는데~'로 시작되는 그 거짓 고해성사는 항상 자신이 설정한 어떤 괴상한 선악과와 아주 나쁜 뱀의 유혹에 의해 마무리되곤 했다. 잘못의 방향성을 무조건 외부로 돌리려는 언 발에 똥 싸기보다 못한 구질구질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여자들은 18세기 프랑스 귀족보다도 양심이 없다. 그런데 진짜 웃긴 점은 이런 것이다. 여자들은 그렇게 자신의 양심을 가래침처럼 뱉어놓고도, 항상 자신의 편을, 좀 더 드라마같이 말하자면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겨드랑이에 땀이 차도록 자신에게 쉴드를 쳐줄 왕자님을 갈구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겨드랑이에 땀이 나면 별로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학교 생활을 시작하며 난 그 'OT의 쌍년'에게 다가갔다. 몇 번 보다 말 것처럼 식사를 하고, 가끔은 술도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이름은 혜림이었다. 이게 참, 사람 일이란 것은 알 수 없다고 느끼는게, 그땐 그렇게 얄밉게 보였던 아가씨가 막상 눈 앞에서 말을 섞다 보니, 좋은 점도 더러 보이면서, 무엇보다 순수하게 웃는 모습이 마냥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큰 키에 고운 피부와 예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큼직한 눈매에 시원한 인상이었고, 그 예쁜 이마가 드러나도록 머리를 뒤로 길게 묶고 다니곤 했으니, 두꺼운 책을 들고 체크 셔츠에 스키니 진을 입으면 그 자체로 이미 캠퍼스 러브 스토리를 보는 듯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내가 서 있었으니, 그 이야기는 바야흐로 캠퍼스 섹스 스토리로 변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나보다. '난 네가 좋다.'는 말에 그녀는 항상 '난 아직 잘 모르겠다.'며 비리에 연루되어 검찰에 소환된 정치인같은 답변만 되풀이하곤 했다. 


 육체는 단명해도 근성은 영원한 것이다. 누군가의 지나가던 한 마디는 나의 청년 시절을 더 굳건하게 만든 신념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근성과 스토킹은 종이 한장 차이가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혜림이는 나의 시선을 조금씩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씩 지쳐갔고 그래도 한번은 더 말해 볼까하다가, 그냥 지금은, 추진력을 얻기 위해 이대로 좋은 친구로 남고 언젠가 그녀가 마음을 열 때를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다음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 학과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선 안경을 쓰고 살이 찐, 신데렐라 어머니의 이복 남동생같은 조교가 혜림이를 신나게 털고 있었다. 학과 행사의 경비 지출에 관한 문제였던 것 같다. 돈이 연루된 일이었기에 평소보다 좀더 날선 비난이 던져지며 언터쳐블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울먹이는 혜림이의 얼굴을 보니 습식 사우나를 통채로 삼킨 것처럼 속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혜림이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

"넌 뭔데?"

"혜림이는 그럴 애 아닙니다. 제가 잘 알아요. 친한 친구거든요"

"미친 새끼 아냐?"


 분명히 난 그 조교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무슨 불꽃 같은 게 번쩍 하더니 내 왼쪽 뺨이 불타는 것처럼 아려왔다. 사실 혜림이가 잘못했을 것이다. 나쁜 마음을 먹고 한 잘못은 아니겠지만, 관리를 소홀히 했다던가, 뭐 그런 식의, 마땅히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오른쪽 뺨을 내밀며 말했다. 


"잘못된게 있는 건 알겠는데, 이런 식으로 화풀이 하시면 안돼죠. 이렇게 예쁜 여자애한테….


 그리고 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왼쪽 뺨을 한번 더 맞은 후 이번에는 꿀밤까지 보너스로 두둑히 챙긴 뒤에 '적당히 해라.'라는 조교의 꾸지람을 듣고 조용히 학과 사무실을 나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사랑이고 섹스고 싸다구고 나발이고 간에, 내가 도대체 뭘 하는 걸까. 나도 참 미친 놈 같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혹시 이런 상황에서 말야, 그녀가 나에게 감동이라도 하면 어떨까? 그녀에게 잘못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으니까. 비록 칼대신 딜도 같은걸 들었지만, 그래도 나름 그녀에겐 백마를 탄 왕자님이 된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그녀가 울면서 과 사무실을 나와 날 안아주기라도 하면 참 좋을텐데.'하는 상상을 하며 벌겋게 손바닥 자국이 남은 얼굴로 킥킥거렸다. 어릴적 엄마에게 만원을 받아 억지로 미용실에 가던 걸음처럼, 난 천천히 강의실에 들렀다가, 아무 일도 없길래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혜림이에게 연락이 왔다. '이야기좀 하자. 고마운 것도 있고, 고기 사줄게.'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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