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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마이애미 비치

마이애미 비치 (9)

프로매국노 2013. 5. 4. 14:16

 혜림이가 자신 속에 품고 있던 미친년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분명 평소에는 상냥하다 못해 내 눈치를 살피기 바쁘고, 심지어 어떤 로맨틱한 순간에는 부끄럽다며 내 얼굴마저 제대로 쳐다 보지 못할 때가 있는 귀여운 아이인데, 도대체 왜 내 일거수일투족에서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는 일만 생기면 괴물로 변하는 것일까? 나는 여성의 질투나 집착, 혹은 남자의 지나친 남성 우월주의적 사고가 보통 그들이 지닌 열등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혜림이와 열등감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난 그냥 평범하게 생겼을 뿐이지만, 혜림이는 인기도 많고 꽤 예쁜 편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공부도 잘했다. 그렇다면 그녀 또한 본인조차 감당할 수 없는 육중한 열정과 감정을 지닌, 과거의 나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그래도 난 선미 앞에서 쿨하기라도 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못했다. 솔직히 생각해 볼 때, 난 그녀 앞에서 내 열등감에 빠져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한 채 돌아섰다. 문득 속이 쓰려왔다. 그러면 지금 내가 만난 혜림이의 모습은, 과거의 나보다 약간 잘난 그런 것일까? 그런데 이런 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는 사랑은 성립되는 것일까? 나는 그동안 누구를 무엇 때문에 사랑했던 것일까? 혜림이에게 나는 어떤 소중한 의미를 가진 특별한 존재인 걸까? 아니면 사랑의, 혹은 집착의 대상으로서만 완결되는 열정의 배출구에 불과한 걸까?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매미 소리가 거슬렸다. 밖에 나가 따가운 햇살속에서 괴로운 담배를 한대 피고 다시 침대에 누워 조용히 생각을 해보려던 중 용석이형에게 전화가 왔다. 술이나 한잔 하자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 무한한 괴로움의 바톤을 그 형에게 어떻게든 넘겨주고 싶었다. 민속주점에서 만난 용석이형은 이미 술에 얼근히 취해 있었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과, 그녀의 복잡하게 꼬인 애정의 실타래를 조심스레 풀어내기 시작했다. 용석이형은 진드기에게 발을 물렸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자는 있잖아, 그냥 꼴리면 되는거야." 

"분명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많은 않은 것 같더라구요."

"야, 생각을 좀 더 해 봐라. 넌 평생을 꼴리는 여자랑 살래? 아니면 너를 배려해줄 여자랑 살래?" 

"그야 당연히 꼴리는 년이죠." 

"그래, 그런거야." 

 

 용석이형은 '내 사전에 불가능한 구멍이란 없다.'는 음탕한 나폴레옹같은 표정으로 딸꾹질을 몇번 한 후,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아주 예전에 나도 모르게 잃어버렸던 사랑을 다시 찾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체르노빌에서 재림한 예수와 같은 사랑이었다. 그녀의 모든 행동들이, 그 찌질했던 예전의 내 모습들과 겹치며 '순수하고 열정 넘치던 풋풋한 패기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 봤다.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미칠 수 있을까. 나도 정말 미친 놈이었지만, 혜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미친 년이었다. 문득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이런 내 마음을 말해주고,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그 순간들처럼 돌아가고 싶어졌다. 나는 집에 돌아오면서 이번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녀를 만났다. 그녀에게선 여태껏 느껴본 적 없던 어떤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날 보는 그녀의, 평소와 달리 약간 붕 뜬 것 같은 표정을 읽으며 나는 그동한 그녀에게 느껴왔던 부담감과 내가 느꼈던 괴로움을 고백했고, 결과적으로 이젠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머리를 긁었다. 그 부끄럽고도 약간은 두근거리던 순간들이 그녀의 한 마디로 정리되었다. 


"나 유학가." 


 관자놀이를 망치로 맞은 것 처럼, 난 약간 어지러워졌다. 


"그동안, 내가 너 정말 사랑했었던 거 알지? 정말 고마웠어. 나 있잖아. 널 만나면서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한다는게 어떤 건지 알게 됐어."

"언제 결정한 일이야?" 

"일주일 전에 부모님께서 결정하셨어. 그리고 사실 나도 꼭 가고 싶어.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단 생각이 들어."

"그렇구나. 잘 됐네. 축하해. 너라면 분명 그곳에서도 잘할 수 있을거야. 난 네 열정을 믿어." 


 왜 하필이면 지금에서야 그런 결정을 내렸냐고 울면서 따지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난 결국 그러지 못했다. 심지어 살짝 웃기까지 했다. 존나게 울고 싶었는데 말이다. 왜? 도대체 왜? 내가 진정으로 널 내 마음 속에 품을 준비가 되었을 때 넌 떠나 버리는 거니? 우리는 내일 세상이 종말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마음 속에 있던 모든 감정을 분출하며 섹스를 했다. 그리고 한번 더 했다. 나는 혜림이의 젖꼭지를 물고 잠이 들었다. 항상 내가 해주던 팔베게가 아닌, 그녀의 팔을 베고, 그녀의 품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축축해져오는 걸 느낀 그녀의 몸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넌 나 없이도 잘 살 수있지? 항상 그랬잖아. 내가 죽더라도 장가는 꼭 갈수 있는 애잖아." 

"몰라." 

"으이구…." 


 혜림이는 한달 간의 준비를 마치고 9월의 마지막 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녀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나에게 하늘색 옥스퍼드 셔츠 하나를 사 주었다. 그리고 나는 한때 내가 자기 전에 한번씩 입어 보던 가죽 자켓을 그녀에게 억지로 안겨 주었다. 날 기억이라도 해 달라는 의미였을까. 난 그렇게까지 그녀의 가슴속에 어떤 자취를 남기고 싶었을까. 배웅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부모님을 뵙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서로 '기다리지 말자. 그냥 언젠가 다시 한번 웃는 얼굴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가 나에게 주었던 것들, 그녀가 내 집에 남겨 두었던 작은 물건들을 모두 정리하고 핸드폰과 미니홈피에 있던 사진마저 모두 지우니 '지나간 내 인생엔 무엇이 남았는가.'하는 허탈함이 들었다. 그나저나 나는, '내 성벽을 이해할 수 있는 여자를 또 만날 수 있는 것이기나 할까?'싶은 불안감에 이틀에 한번씩 자위를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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