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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마이애미 비치

마이애미 비치 (11)

프로매국노 2013. 5. 10. 16:51

 그날 은지는 빨간 코트와 허벅지까지 달라붙게 내려오는 쥐색 니트, 그리고 검정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난 갑자기 그 검정 스타킹을 벗겨보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문을 쿵쿵 두드리고 똥이라도 마려운 듯 발을 굴렀다. 천천히 문을 연 은지는 파란 물방울무늬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내가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은지는 화장을 지우고 나왔다. 통통하고 뽀얀 얼굴이 앳된 고등학생같이 보였다. '이것도 나름대로 나쁘진 않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봉지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진 뒤에 옷을 벗었다. 살짝 당황한 은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려는 것을 내 혓바닥으로 막자,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고 코끝에 걸린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얇은 파자마 속으로 내 두툼한 손을 집어 넣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내 손목에 매달려 '오늘은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겠는데.'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다는 거다. 그땐 그런 속삭임까지 눈치 챌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목을 한쪽 손으로 받친 뒤 부드럽게 밀어서 눕혀놓고, 천천히 그녀의 파자마를 벗겼다. 그리고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정성스럽게 침을 바르고, 너와 나 사이의 거리를 0.05mm로 좁히기 위한 것을 똘똘이에 씌운 뒤, 그녀의 양 다리를 붙잡고 허리를 물결처럼 움직였다. 점점 거칠어지는 그녀와 나의 숨소리 속에서, 나는 역번지점프라도 하듯이 하늘로 솟구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또 그때처럼, 전에 누군가에게 그랬던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이, 씨발! 개 좆 같은 년!" 


 그리고 나는, 그녀의 희고 부드러운 몸을 묵직하게 끌어안았다. 아무말 없이 웃어주는 그녀에게 약간 미안해졌다. 그래서 또 한번 키스를 했다. 아까보다 조금은 더 끈적하고 약간 더 달짝지근한 느낌이 들었다. 자궁인줄 알고 나갔더니 콘돔 속에서 눈을 뜬 불쌍한 정자들을 휴지에 싸서 버리고 간단한 샤워를 마친 뒤, 나는 그녀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있잖아."

"응?"

"그런 거, 일부러 하는 거 아니지?"

"어 사실 그게 말이야, 나도 어떻게 안되더라고. 일종의 컴플렉스야. 언제부터 그랬냐면….


 그녀는 불편한 눈치였다. 내가 누군가와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누군가의 몸을 핥던 상상이라도 했나보다. 그러면서도 갈곳 없이 헤매던 내 청춘을 결국엔 자기가 품어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내 이야기 하나 하나에 눈을 빛내고, 씁쓸해하고, 가슴아파해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나의 거짓말….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데, 그때 난 그녀의 감성을 기만했다. 


"난 말야, 그래도 아직은 누군가를 믿고 싶어. 내가 누군가를 정말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 대상이 마치 너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그녀를 뜨겁게 쳐다보았고 그녀는 은메달을 딴 감격처럼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느낀 자신의 감정들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나에게선 약간 차갑고 위험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땐 그런 이미지때문에 약간 무섭기도 했었다고. 평소엔 늘 음침했지만서도, 자신의 앞에선 상냥하게 웃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말 끝마다 느껴지는 소소한 배려들에 나와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앞에서 나도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너와 하고 싶었다.'고 말하면 왠지 그녀가 거북해할까봐 그냥 '난 네가 귀여워서 좋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귀엽다거나 예쁘다는 말은, 즉 너와의 성교를 상상하며 밤잠을 설쳐본 적이 있다는 말과 어느 정도 상통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일종의 은유가 아닐까. 문득 인터넷에서 본 산악회 은어가 생각났다. 진달래는 '진짜 달라면 줄래?'였고 택시는 '택도없다 시발넘아'라던가. 한여름 반바지 주머니 속에서 나온 핫팩처럼 뜬금없는 이야기에 난 그녀를 끌어안고 킬킬거리다가, 눈동자에 커다란 물음표를 띄운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면박을 들었다. 어쩜 넌 그런 것 밖에 모르냐며. 그럴 때마다 난 조상의 악덕이 후손의 불행으로 계승된다는 이야기를 꺼낸 도인의 표정으로 변해, 진정한 교감이라는 건, 어떤 어휘나 개념으로도 그 자체가 불가능하며, 무한하고 감각적인 육체의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식의 궤변을 펼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따듯하게 날 보며 웃어주던 은지의 모습에선 어떤 모성같은것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조금씩 날 참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어쨋든 그날 이후로,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이전과 다른 위치에 설정해 놓고, 그에 따른 의무감과 같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무작정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 오기도 하고, 이름도 모르는 동네를 헤매다 들어간 돈까스 집에서 맛없는 칼국수를 먹은 뒤 '이럴거면 김밥천국이나 갈걸.'하는 후회를 하기도 했고, 주말에는 수업을 일찍 마친 다음 해돋이를 보자며 동해 바다로 간 적도 있었다. 차창 밖의 풍경을 보며, 내 고추를 핥는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추억은 더욱 아름다웠다. 해가 지는 광경을 보다가 섹스하고, 해가 뜨는 광경을 보며 섹스하고, 언젠가 '너는 나랑 섹스를 하려고 만나는 것 같다.'는 그녀의 추궁에, 섹스만 하려고 만나는 것보단 낫지 않느냐며 다시금 진한 키스를 나누던 순간들이 지나갔다. 은지는 언젠가 내가 섹스를 할 때 욕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조금 천천히 무미건조하게 섹스를 해 봐도, 혹은 그녀의 혓바닥이 나의 고추와 엉켜 정점을 느끼더라도, 적어도 '씨발'이라던지 '좆'같은 단어는 전혀 빠지지 않았다. 내가 가끔 '창녀'라는 단어를 뱉을 때마다 그녀는 가슴을 쇠몽둥이로 맞은 것처럼 아파했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답답해졌다.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가끔씩만 섹스를 하기로 하고, 평소엔 키스만 하기로 했다. 결국 난 서로의 감정이 엇갈린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며 섹스없이 어떤 감정을 나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한겨울 맨손으로 잉어를 낚아야 어머니의 불치병이 낫는다는 것처럼, 아예 불가능한 상황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앞에 산신령은 없었다. 보다 온건하고 따듯한 애정을 바라며, 나에게 그것을 주고 싶어하던 한 여자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난 보다 위험하고 치명적인 애정을 바랬다. 그러면서도 나는 항상 그녀가 나에게 느낀 거리보다 한 발짝정도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한 발짝 더 가까운 거리에서 날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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