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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마이애미 비치

마이애미 비치 (13) 完

프로매국노 2013. 5. 11. 15:11

  수영이와의 만남은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난 술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불행하며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버리고 말았다는, 비장한 비참함에 더욱 심취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벌이라는 건 기껏해봐야 노숙 정도였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며칠째 비가 내렸기 때문에 제법 쌀쌀하던 9월의 밤이었다. 나는 학과 자료실의 1인용 쇼파에 앉아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문을 연 순간 그 쇼파에는 조금 예쁜 티벳여우 한마리가 앉아있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생긴 아가씨였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누군가 들어온 것에 살짝 놀란 그녀는 담배를 한모금 빨고 쭈욱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봤다. 


"안녕."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야? 이시간에…. 술 좀 마신 것 같은데?" 

"잘려구요." 

"정신 나갔구만."

"조금 많이요."


 그녀의 얇은 분홍색 입술이 조소를 띄며, 깊고 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무슨 이유로 조금 많이 정신이 나갔는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나는 세상엔 참 별의별 년이 다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의 눈동자에 조금씩 휘말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조금이라도 내 과거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게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그녀는 넌, 씨발, 존나, 무책임, 한심이라는 다섯 가지의 어휘만으로, 내 과거를 관통하는 어떤 작은 담론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는 나를 석고석 덩어리처럼 세워놓고 그 작은 주둥이에서 끌과 망치같은 말들을 뱉어내며 날 까내려갔다. 난 세탁기에 들어가 탈수가 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 나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읽고 사람을 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사람인지 점점 궁금해졌다. 


 수영이를 만날 땐, 주로 술을 마셨다. 소주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고, 막걸리도 마시고, 소맥도 마시고, 가끔은 마티니나 데킬라 선라이즈를 마셨다. 언젠간 낡은 건물의 옥상에서 일몰을 감상하며 팩소주로 건배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나의 반지하 자취방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제멋대로 어질러진 내 방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지하의 낭만과 같은 곰팡이 냄새와, 그것보다 더 퀘퀘한 홀애비 냄새가 나고 있었다. 살짝 부끄러웠지만 나는 방을 대강 정리하고 앉을만한 곳을 만든 뒤, 상을 펴고 과자 봉지를 뜯었다. 소주잔과 입술 사이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녀에게 '누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 같은 년을 알아서 뭘 하겠냐.'며 웃었고, 난 그 순간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어느 새 나의 머릿속엔 그녀의 이미지들만이 노이즈처럼 우글거리고 있었다. 


"넌 나를 정말 미치게 하거든. 그리고 나도, 널 존나 미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번뜩이는 시선을 교차한 뒤, 서로의 혓바닥을 묵직하게 섞었다. 누구의 혓바닥이 먼저 녹아버려야 끝이 날 법한 내기 같은 일이었다. 한 시간이 흘렀다. 나와 그녀는 알몸이 되어, 각자 이번에야말로 내가 먼저 너의 몸을 녹여버리겠다는 결심이라도 한 듯, 서로의 몸을 핥고 핥고 또 핥았다. 나는 그녀의 성게속에 숨겨진 빨간 콩 같은 것을 정신없이 핥고 있었고, 그녀는 나의 빙빙바속에 담겨있는 연유까지 남김없이 빨아먹겠다는 기세로 나와 엉켜있었다. 그렇게 또 한 시간이 흘렀다. 이젠 적어도, 그녀의 몸에선 그녀의 체취보다 내 침냄새가 더 많이 날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아직 풀리지 않은 열정을, 아침의 영광같은 삽입으로 끝내야 한다는 어떤 계시 같은 것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치대다보니 어느새 하나가 되어버린 찹쌀떡처럼 끊임없이 맞부딪치며 서로의 고독을 극복하고 있었다. 난 그녀의 몸속 어느 깊은 곳이 나의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쥐락펴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정확히 0.00mm였다. 머릿 속을 하얀 벽지로 도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이곳이 어딘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빗취! 마이애미 빗취!"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린 것 같았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 나에게 소리쳤다. 


"마더 훡커! 애스 홀!" 

"아, 씨발!" 

"개새끼!" 


 몸이 야구공만하게 접혀 랜디 존슨에게 던져진 것 같던 시간들을, 고작 두 숟갈의 정액으로 치환해 그녀의 배 위에 흩뿌린 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그동안 못다 흘렸던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리고 정말 마법같이, 나는 더이상 섹스를 하다가 여자에게 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정말 길고 긴 여정이었다. 짧다면 짧았겠지만, 정말 잊고 싶지 않던 순간이 있었고, 잊어버렸으면 차라리 좋았을 법 한데도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벌써 삼년째 만나고 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때로는 서로를 미칠 듯이 미워하다가도, 네가 없는 내 삶은 상상할 수 없을 것처럼, 다시 그녀의 곁에서 행복을 꿈꾸고, 미래를 그리고, 다시 괴로워하고, 사랑하길 반복했다. 

   

 가끔 생각해 보면 정말 웃긴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오늘, 나에게 더 재미있는 일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아 낸 건지, 선미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연락해서 미안하지만, 괜찮다면 직접 만나서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장난처럼, 그녀가 왜 날 버렸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것 때문에 한참동안 괴로워했던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저녁에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정말 오래된 추억이었고, 이젠 그저 웃음거리도 안되는 일들 뿐인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걸까? 재혼이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애를 낳고 돌 잔치를 하나? 그래서 혹시 내가 그런 곳에 가기라도 한다면 축의금이라도 걷어볼 심산인걸까? 그렇게 길지도 않았던 연애였고, 그렇게 특별한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까짓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다고 나같은 놈까지 기억하고 있었을까? 


 선미는 낯선 동네의 허름한 카페에 정확히 십 분 늦게 도착했다. 단정한 코트에 검은색 치마와 검정 스타킹을 신은 그녀는, 어릴 적의 청초했던 모습을 초월한 성숙한 여인의 향취를, 마릴린 먼로의 샤넬 넘버 파이브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응. 삼년정도 만나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복학한 이후로 학교도 잘 다니고 있지."

"그때 나 많이 미웠지?"

"별로?" 

"치." 


 선미는 순간 복잡해졌던 표정을 여유롭게 풀어 나간 뒤, 숨을 크게 고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있잖아, 나. 너랑 만나기 한 달 전쯤에, 학교에 있던 양아치들한테 성폭행 같은 걸 당했어."  

"아…."

"정말 힘든 시간들이었어. 밖에 나갈때 혼자 나가본 적이 없어. 장난처럼 나갔다가 억지로 술을 먹고 당한 일이라 어디 말할 데도 없었어. 친구들이랑 이야기도 하기 힘들었고, 심지어 내가 누군가를 만나서 사귀거나 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 그런데 있잖아. 그때 네가 내 앞에 딱 나타난거야. 솔직히 처음엔 조금 싫었어. 네가 내 슬픔을 알 리 없었으니까. 그런데 네가, 너무 대단했던거야. 지금 생각해도 그래. 어릴때라 그런건진 모르겠는데…. 그래도 난 널 만났던 이후로 누군가가 날 그렇게까지 사랑해줬다는 느낌을 느껴본 적이 없어. 그냥 예뻐서?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하는 애들은 많지만…. 그렇게 내 이야기들을 일일히 기억해주거나, 편지를 쓰거나, 쓸모도 없는 개구리나 학을 밤새도록 접는 열정적인 남자는 내 인생에서 처음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널 만난거야.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더라구. 너랑 있을 땐 몰랐는데, 혼자 남게되면 나도 내 마음속에 있는 슬픔이나 고통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거야. 그렇다고 너한테 이야기를 하려니, 너도 받게 될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고…. 정말 그랬지…. 특히 그런게 있잖아. 트라우마라는거. 그게 정말 진득하게 오래 가더라고. 그래서, 그게 너무 흘러 넘쳐서, 난 내가 너무  비참한 마음에 너까지 싫어졌던 때가 있었어. 그런데 그 어린 여자애가 뭘 할 수 있었겠니? 그냥 혼자 집에 있거나, 가끔 술이라도 마시거나 그러면서 지냈어. 그러다가 방학때 부모님이랑 잘 이야기 하고 결국엔 자퇴를 했었지. 그때 사촌 오빠랑 왔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애인이랑 왔다는 소문까지 났더라? " 

"아…." 

"나중에야 알았지만, 심지어 그때 성병까지 옮아서 산부인과도 다녔어. 그런데 있잖아…. 너 혹시 나 만나고 성병 걸린 적 있니?" 

"아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동안 난 뭘 한걸까. 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자들을 쌍년이라 생각하고, 섹스를 하며 욕을 하고 있었던걸까.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선미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때, 나 밤에 혼자 집에서 울고 있을 때, 네가 우리집까지 뛰어왔던거 기억나? 딱 오분 걸렸잖아. 그때 진짜 고마웠는데. 그래서 우리 새벽 세시까지 놀이터에서 손잡고 있었잖아." 


 모든 것을 잃었던 소년과, 잃고 싶지 않았지만 끝내 잃어버리고 말았던 소녀가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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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세상에는 정말 수많은 개새끼와 쌍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년놈들을 사랑했던  병신같은 놈과 바보같은 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장기판의 말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딱히 한 자리에서 영원히 쌍년짓을 한다던가 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좌표를 시시각각으로 바꾸며 때로는 어떤 놈에게 휘둘리던 바보 같던 년이, 어느날 어떤 병신 앞에선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같은 쌍년이 되어 돌아오곤 한다는 겁니다. 한때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이라는건 아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존나 대단한 건 아닌데, 그렇다고 그것이 어떤 티미한 것도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건 그것을 믿거나 혹은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해 보는 방식의, 말하자면 그 앞에서 자신이 설정한 태도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는 그래도 아직은, 그런 걸, 약간은 믿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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